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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여자 만나는 법(feat. 일본어 학원)

집필/새로운 소설

by 뚜뚜 DDUDDU 2022. 6. 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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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바쁜 덕에 주말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얼마 전에 등록했던 일본어 학원 수업의 첫 날이다. 사실 일본어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덤으로 학원에서의 로맨스를 꿈꿨던 건 당연했다. 늦은 오후 시간이 다가와서 늦지 않게 학원으로 출발하였다. 첫 시간이기에 나름 멋을 부려 베이지색의 트렌치코트와 파란색 셔츠로 말끔하게 차려 입었다. 어제 팀 회식 때문에 술을 새벽 2시까지 퍼부어서 회식 내내 학원에 갈 때 힘이 들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막상 쉬다 보니 컨디션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4시 40분 정도에 강의장에 도착하고는 왼쪽 뒤편의 자리에 앉았다. 처음 수업인지라 서로가 눈치만 보느라 말이 없었고 예상한 대로 수강생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썰렁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강생 중 70퍼센트 정도의 인원이 직장인으로 보였으며, 그 외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친구들 몇몇이 벌써부터 학습의 의욕이 불타올랐는지 맨 앞자리를 채우고 앉아서 교재를 펼쳐보고 있었다. 오른쪽 뒷자리에는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로 수수하게 차려 입은 한 젊은 여자가 눈에 띄었는데, 쌍꺼풀이 예쁜 큰 눈에 얼굴이 작고, 긴 머리에 웨이브가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책상 앞으로 허리를 숙인 채로 맑고 큰 눈으로 오늘 받은 교재를 껌벅껌벅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나는 두어 차례 슬쩍 그녀를 쳐다보기도 하다가 교재를 한 번씩 훔쳐보기도 했다. 거의 다섯시가 다 되어가니 강사로 보이는 키가 큰 중년의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강의실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요. 교재는 다 받으셨죠? 그럼 먼저 출석을 한 번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호명되신 분들은 처음이라 쑥스러우실 수 있으니 살짝 손을 올려 주시거나 ‘예’ 라고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강사가 말했다. 강사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들렸다. 좋은 목소리라서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 한마디로 선한 인상을 풍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사는 먼저 학습생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내 순서가 되었을 땐 나의 존재를 어필해 보이기 위해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해주었다. 출석체크가 끝난 뒤, 강사는 바로 강의에 대한 개요를 설명해주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수업은 일본어를 아예 한 번도 접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한 것이니 그 기준에 맞춰서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혹시 일본어를 어느정도 공부하고 오신 분이 계신가요? 아니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대충은 아시는 분들은 손을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앞쪽의 남자 두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분들은 오늘 수업 들어 보시고 본인에게는 너무 쉬울 것이라고 생각되면 다른 수업으로 옮기셔도 괜찮으니 한번 고려해주세요. 그럼 지금부터 모두 같이 시작해보도록 하죠. 처음엔 알파벳과 같이 일본어의 기본인 히라가나를 익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수업전에 나눠드린 교재 5페이지를 보시면 히라가나표가 보이거든요? 이건 기본적으로 외워 주셔야 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천천히 따라와 주시면 쉽게 외울 수 있어요. 교재에 적혀 있는 글자들을 순서대로 하나씩 따라해보죠.……”

 

우리는 강사가 불러주는 순서에 따라서 아이우에오라는 발음부터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몇 가지 인사말까지 배웠다. 그녀는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고 느낄 정도로 수업 내용을 쉽고 재밌게 알려주었는데, 막상 두시간 동안 배웠던 내용들을 떠올리니 멍청하게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복습을 해야만 수업을 쫓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서 해야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면서 짐을 싸고 있는데 성격이 급한 수강생들은 수업을 마치자 마자 순식간에 짐을 싸고 벌써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오른쪽 뒤편에 앉아 있었던 귀여운 여인은 아직 짐을 싸는 중이었기에 조금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기 위해서 약간의 시간 격차를 두고 뒤따라 갔다. 소중한 주말 시간을 쪼개서 참석한 수업에서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혼자 수업을 듣고 집에 가는 따분한 일상이 반복될 것 같아서 용기 내어 말을 걸어 친구가 되어 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를 쫓아가서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얌전히 엘리베이터 구석에 어색하게 서서 심호흡을 작게 한번 했다. ‘위이이잉’ 소리를 내며 우리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 이어서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돌려서 잠시 쳐다보는 척하다가 미소를 띄고는 바로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방금 수업 같이 들은 것 같은데 혹시 기억 나세요? 전 왼쪽에 앉아있었는데.”

“아, 예. 아까 뵌 것 같아요.”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반갑게 응답해주었다.

“반가워요. 수업은 어떠세요, 가르쳐 주시는 내용에 대해서 이해는 잘 되셨어요?”

“네, 조금 어렵긴 한데 친절하게 해 주셔서 좋은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저도 괜찮았어요. 사실 크게 기대는 안하고 왔었는데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더라고요. 집도 멀지 않아서 크게 부담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 집이 근처세요?”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도 천천히 걸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근처는 아닌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백운역 아세요? 그 쪽에서 살고 있어요.”

“네, 몇 번 가봤어요. 멀지는 않으시네요. 저는 부평역 근처에 살고 있어요.” 나이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이 가까웠다.

“저보다도 훨씬 가까우시네요.”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는 점을 알고 나서는 더욱 그녀를 알고 싶었다.

“수업도 끝났는데 혹시 다른 약속 있으신가요?”

“아뇨, 집에 갈 예정이었어요.” 이렇게 대화를 진행할 때 우린 이미 시내를 나와서 조금 걷고 있었다. 약간은 설레기까지 하였다.

“그럼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건 어떠세요? 괜찮은 카페가 있는데.”

“그래요? 네, 전 괜찮아요. 그럼 가시죠.”

 

아주 자연스럽고 순탄하게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사실 내가 아는 괜찮은 카페 따위는 없었다. 커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커피 맛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나였다. 바로 앞에 스타벅스가 보이기에 말을 꺼냈다.

 

“바로 앞에 있네요, 괜찮은 카페.” 그녀가 입에 손을 올리며 귀엽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요, 카페.”

카페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공간에 여유 있게 테이블이 깔려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주말 저녁인지라 사람들이 빼곡했다. 좀 더 자세히 둘러보니 한 두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킨 뒤, 그녀가 계산하려고 하기에 내가 잽싸게 카드를 내밀면서 말했다.

“오늘은 제가 계산할게요. 제가 먹자고 했는데요, 뭘.”

내가 ‘오늘은’이라는 단어를 굳이 붙였던 이유는 오늘만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다음 만남까지 기약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나왔던 희망의 단어였다.

“혹시 대학생이세요?” 내가 물었다.

“아뇨, 이 근처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저는 간호사예요. 무슨 일 하세요?”

“아, 그렇구나. 어려 보이셔서 일을 하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네요. 저는 인천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회사에서도 그렇고 일본어를 배우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 무작정 학원을 등록하게 되었네요. 원래 일본어에 관심이 있으셨어요?”

“네, 저는 틈틈이 일본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을 보고 한 번쯤 배워보고 싶었어요. 언어를 알면 문화를 알 수 있다고도 들은 것 같아서 먼저 언어를 익혀볼까 생각했어요. 다행이도 학원 수강생이 많지는 않아서 수업에 집중하기도 좋은 것 같아요. 너무 사람들이 많으면 집중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다행인 것 같아요. 사람이 많으면 수업 중에 한 명씩 일본어로 말해 볼 시간도 부족한 것 같아요. 약간은 배고픈 시간대로 등록하긴 했지만 괜찮은 것 같아요. 계속 다니실 거죠?”

“그럼요!”

 

 

그녀가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활짝 웃기에 나도 한번 웃어 보였다. 이어서 주문한 커피를 받아서 한 모금씩 마신 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모처럼의 생기 넘치는 대화가 즐거워서 커피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한 속삭임으로 인해서 뜨거웠던 커피가 차갑게 식어버릴 때까지 그 커피의 존재를 잊게 해주었다. 일에 대한 것들과 일본어 학원 수업, 그리고 서로의 친구들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는데 대화로 알아낸 중요한 사실 몇 가지가 있었다. 먼저 그녀의 이름은 ‘한다솔’이며 나이는 25살이었다. 그리고 현재 만나는 남자는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는 서로에게 호감이 있음을 충분히 느꼈던 자리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간호사라는 본인의 직업에 대해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차이에 대해서 엄격한 기준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첫 만남부터 식사를 함께하자고 강요하거나, 술을 한잔하는 것을 원하면 굉장한 실례일 것 같아서 다음 수업 때 같이 옆 자리에 앉기로 약속만 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부평역사 앞까지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아마도 다음 만남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는데 운명적인 만남에 시간을 오래 끌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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