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과 단체미팅과 같은 것들에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몇 번의 활동 경험이 있어서 잘 알고 있는 주미의 그 남자, 성태에게 자문을 구해보았다. 그는 최근 유행하는 ‘신비로운 만남’이라는 단체미팅이 괜찮을 것 같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단체미팅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일단은 온라인상에서 등록을 하고 참가비라는 명목의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만 다양한 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남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는데 남녀 각각 20명을 한 자리에 초대하여 한 테이블당 남녀 각각 두 명씩 한 테이블에 앉아서 미팅을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미팅이 거의 매주 개최가 되었는데, 실시간으로 이번 미팅에는 남녀 각각 몇 명의 인원이 신청을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원이 꽉 차기 전에 얼른 신청을 해야만 했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로 다음주의 미팅은 이미 신청 인원이 모두 차버렸고 다행이도 2주 뒤에 서울에서 개최되는 미팅에 거의 막차로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절차를 거쳐서 삼만원이라는 큰 돈을 지불하고 미팅 참석의사를 밝혔다. 괜찮은 여자들이 나오기만 바라며 그 날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스템에서의 낯선 모임에 아무래도 혼자 가기에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기 때문에, 재철이라는 대학 친구에게 모임에 함께하자고 설득하여 결국 2인 동반참석을 하기로 했다. 재철이는 대학 동기였는데 그는 술을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함께 당구를 치거나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나와 녀석은 모든 것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편한 친구였기에 그는 내 제안을 흔쾌히 따라주었다.
2주의 시간이 흐르고 미팅이 개최되는 바로 그 날, 12월 첫 주말에 이른 시간부터 나와 재철이는 역삼역에서 만났다. 같이 미팅에 동행해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재철이를 위해 미리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을 준비해 두었다. 재철이는 약속시간에 거의 딱 맞게 도착했다.
“어이! 준비됐지?” 반갑게 나를 보며 외쳤다.
“말해 뭐해?” 당차게 대답하고 우리는 모임의 장소로 행진했다. 재철이는 멋진 카키색 코트를 뽐내며 연신 파이팅을 외쳤다.
모임이 이루어지기로 한 곳은 역에서 5분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지하의 어느 넓은 카페였다. 주변은 아파트단지와 몇 개의 상가들만 있는 곳인데 너무나 조용한 동네라고 느껴지면서 과연 이런 곳에서 수십명이 왁자지껄 노는 분위기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담배를 피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간단하게 이번 미팅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안에 들어가면 과자와 음료 같은 먹거리는 계속 나눠준다고 했어. 그리고 우리는 2인 1조로 테이블을 옮겨 다니는 거지. 테이블마다 두 명의 여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을 거야.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그녀들과 얘기를 하면서 친해지면 되는 거야. 그렇게 테이블마다 각각 20여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짧은 시간 안에 테이블에 있는 여자들과 친해진 다음 연락처까지 받는 방식이래. 나도 대충 거기 까지만 들었는데 더 자세한 건 가 봐야 알겠지? 어쨌든 재밌을 것 같아.”
“괜찮은 여자들이 과연 미팅에 돈을 내가면서 과연 참석할까?” 날카로운 질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직장에서 외에는 딱히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지 않았어? 기껏 해야 누군가에게서 소개를 받는 것뿐이지. 내 생각에는 어찌 보면 이 미팅은 나이트클럽 부킹의 낮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니면 소개팅을 한 번에 여러 번 받는 거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
재철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흥미롭구먼?”
몇 마디 얘기를 더 하다가 미팅이 시작할 시간이 되어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카페로 들어섰다. 앞에서 입장을 통제하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더니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고는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는데 사전에 들었던 것처럼 테이블마다 남녀가 두 명씩 자리에 앉아있었다. 모두가 예쁘고 화려하게 꾸미고 온 듯해 보였다. 나 역시 멋진 카멜색 코트를 입고 왔다. 이 코트가 오늘 좋은 인연을 찾게 해 줄 것이라는 내 멋대로의 기대감을 가졌다.
“3번 테이블로 가서 앉아 계시면 됩니다.”
우리는 안내해 준 테이블로 다가섰다. 그 테이블에는 20대 중반 정도가 되어 보이고 귀엽게생긴 두 명의 여자가 이미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옆자리에 앉으니 살짝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나도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잠시 주변을 한껏 둘러보았다. 대충 남녀 성비는 비슷하게 보였으며, 드문드문하게 인상적인 미모의 여자들도 눈에 띄었다. 카페의 벽면에는 과자와 커피가 쌓여 있었는데 아마도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면 나눠 줄 셈인 것처럼 보였다. 재철이는 이 자리가 어색한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자리가 채워지고 약속된 시작 시간이 되자, 말끔하게 턱시도를 차려 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신비로운 만남의 자리에 와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단 오늘 미팅 방식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테이블에 앉아 계신 분들과 20여분간 즐거운 시간을 갖으신 뒤, 종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그러면 남성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바로 앉아 있었던 테이블 번호보다 2번 높은 수의 테이블을 찾아 가서 앉은 뒤에 새로운 분들과 대화를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테이블에 8번이라고 써 있는 곳에 앉으신 남성분들께서는 10번 테이블로 가시면 되겠죠? 일단 시작하기 앞서서 제가 가리키고 있는 저쪽으로 가셔서 커피와 과자를 드실 분들은 하나씩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시간가량의 오늘의 미팅 시간이 모두 종료되면 제비 뽑기를 하여 경품추첨을 할 예정입니다...”
사회자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음료를 챙겨왔다. 나와 재철이 역시 과자와 함께 커피를 한 잔씩 가져왔다. 그 뒤로 아까 인사를 했던 여자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의외로 나와 재철이가 몹시 당황할 정도로 20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테이블마다 이야기의 소재는 거의 똑같은 흐름을 거쳐갔는데 이를테면,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라든지, “혹시 어디에서 사시나요? 어떤 일을 하시나요?” 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취미는 어떻게 되나요? 이런 곳은 처음인데 혹시 이전에 와 보신 적 있으신가요?” 같은 말들로 짧은 시간내에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펼쳐 보이려 했다. 여자들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다음 새로운 남자들이 와서 자리하면 그때부터 다시금 대화를 시작했고, 반대로 남자들은 매번 종이 치면 테이블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회전 초밥집의 다양한 모습의 초밥들이 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이 신선하고 충격적인 경험이 너무나 짜릿했다. 어차피 남녀 상관할 바 없이 이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고 싶다는 순수하고도 성스러운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엔 대부분이 첫 인상이 괜찮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을 보았다. 나와 재철이도 마찬가지의 목적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입을 연 결과 각각 4명의 이성에게서 연락처를 받았다. 그리고는 항상 연락처를 받은 후에는 당신에게서 처음 받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가 보았던 매력적인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빠져들었던 여자들은 놀랍게도 처음 우리가 앉았을 때 같이 있었던 이들이었다. 나와 재철이는 우연치 않게도 때묻지 않고, 피부가 하얀 스타일에 매력을 느꼈다. 함께 앉아있었던 두 명의 여자들 모두가 그런 스타일인지라 우리가 동시에 그녀들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27살의 나이에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약간 각진 여자는 본인의 이름이 채민정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대치동의 어느 디자인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녀와 동행한 친구는 김효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는데 마치 귀여운 생쥐같은 생김새를 갖고 있었으며, 어느 회사의 비서 업무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효정이라는 여자는 그녀의 친구보다는 활발한 성격을 띄고 있었다.
드디어 두 시간 동안의 긴 만남의 시간이 끝나고 사회자가 제비 뽑기를 통해서 경품을 나눠주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경품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경품증정에 시선을 뺏겨 있는 사이에 구석에 앉아있던 마음속으로 선택한 그녀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들 역시 처음 경험해보는 미팅이라고 나에게 말했었다. 이 시간이 신선하고 재밌다는 듯이 서로가 마냥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신비로운 만남의 모든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우리도 재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아직 오후 4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두 시간동안 끊임없이 입을 놀리는 바람에 정신이 멍하고 지쳐 졸음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서울까지 와서 이대로 가기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가만히 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뒤늦게 하얗고 순수해 보이는 27살의 그녀들이 걸어 나왔다. 아마도 이 근처에는 별 다른 놀잇거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전철역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횡단보도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들에게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했다. 내 옆에 앉았던 채민정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수줍어하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네, 안녕하세요.”
“혹시, 시간이 애매해서 점심 안 드셨다면 이 근처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 같이 드실래요?”
잠시 그녀들끼리 눈빛 교환을 하더니 이번에는 효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녀가 알겠다고 말했다. 나와 재철이는 무언의 눈빛으로 쾌재를 불렀다.
네 명의 젊은 남녀는 길을 건넌 뒤 주변을 잠시 걸어 다니며 괜찮은 음식점을 찾기 시작했다. 모두가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한참을 헤매다가 하얀 간판의 족발집이 이제 막 문을 열었기에 오늘의 개시 손님으로 입장하였다.
우리는 족발 모듬세트와 소주, 맥주를 한 병씩 주문하였다. 그러고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견뎌야만 했다. 이곳 근처의 분위기에 대해서 얘기하고 다시금 각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의 썰렁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재철이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런 미팅에 처음 오신 거라고 하셨죠? 어떤 것 같아요?”
“신기하더라구요. 생각보다 사람도 많고, 나름 재미도 있더라구요.” 활발해 보이는 효정이라는 여자가 대답했다.
“우리 오늘 처음 만났지만 이렇게 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인연인데 서로 말 놓기로 해요.” 내가 제안하니 모두가 웃으면서 수긍했다. 두 여자 모두 까다롭지 않은 성격으로 보여서 처음에는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했지만 오히려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카페에서의 복잡한 분위기보다 훨씬 편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누가 먼저 미팅에 오자고 했어?”
“내가 인터넷에서 광고를 보고는 재밌을 것 같아서 오자고 했어. 그쪽은?” 효정이가 말했다. 역시 그녀의 활발한 성격이 모임을 먼저 제안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내가 오자고 해서 왔어.” 내가 말했다. 그러고는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어떤 남자를 좋아해? 외형적으로나 성격으로나.”
“나는 유머러스한 남자가 좋아! 그리고 나를 좋아해주는 남자?” 효정이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이내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가 좋은 것 같아.” 민정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부드러웠는데 여성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굉장한 매력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러면 외형적인 모습은요? 어떤 스타일을 좋아 한다던지…….”
“외형적인 건 그렇게 따지지 않아요.”
이런 서로의 호감에 대해서 캐묻다 보니 질감이 부드러워 보이는 족발이 등장했고, 우리는 두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맛있는 족발을 안주 삼아서 술을 마시며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두워질 무렵에 식당을 나와 그녀들과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나와 재철이는 근처의 당구장에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리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대단히 유쾌한 만남의 시간이었으며 소중한 성과도 있었으니 최고의 하루를 맞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두 여자를 모두 만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둘 중의 어떤 여자가 더욱 마음에 드는지에 대해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 엄청난 고민에 도무지 당구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 큐 대를 거의 내려놓아야만 했다.
첫 만남에서 느꼈지만 두 여자 모두 각자의 매력이 충분했다. 민정이의 순수함과 효정이의 활발함이 나의 마음을 끌기 충분했다. 재철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만 했는데 그녀들이 사는 곳과 성격, 그리고 외모와 같은 이런 저런 것들을 생각해 보며 각고의 고민 끝에 나는 민정이를 택했고 재철이는 효정이의 매력에 더욱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결정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면서 고민한 끝에 내린 최고의 결과였기 때문에 우린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하고 우리의 선택이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옳은 선택이었는지, 즉 민정이는 나에게, 효정이는 재철이에게 호감을 가졌는지 확인하는 절차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자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들처럼 우리는 조심스럽게 각자가 선택한 여자들에게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연락을 했다.
결국 우리는 당구장에서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30분이 넘어가도록 다섯번 밖에 큐를 들지 못했다. 재철이에게 효정이로부터 답장이 왔고 몇 분 시간이 지난 후 나에게 민정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나는 그녀와 다음 주말에 서울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당구장을 나오니 날카롭게 내리는 싸리 눈이 칼바람과 함께 나에게 불어왔는데 이상하게도 심장은 따뜻해지고 있었다.
- 백야의 그늘(삭제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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