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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등산로보다 복잡한 삶의 여정

집필/새로운 소설

by 뚜뚜 DDUDDU 2022. 6. 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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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입구 역을 가기 위해 전철을 서둘러 탔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출발하고 이내 빠른 속도로 서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열차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의 밝은 햇살이 냉랭한 분위기의 열차 칸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주말의 아침 열차에 탑승한 부지런한 나그네들은 대다수가 얼굴에 세월의 주름이 가득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고, 팔짱을 끼며, 눈을 감은 채로 모든 잡념들을 비우며 어디로든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 중 대부분은 자주 찾는 산과 가보지 못한 산으로 가서 내려오는 길에 시원하게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단잠에 빠질 것 같았다.

 

 

운동을 워낙 드문드문 해 왔었기 때문에 산을 탈 수 있을 체력이 되는지 조심스럽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 간다면 잡담을 나누고 가다가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착해 있을 것이었다. 잠깐 정상의 거대한 바위 위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해보기도 하고 내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급행열차로 갈아탄 덕에 꽤 일찍 신도림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재철이는 내게 불평 섞인 소리를 잘 하지는 않지만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는 그에게 기분 나쁜 일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지하로 내려서자 수 많은 젊은이와 늙은이들이 각자의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 동선들이 복잡하게 꼬여 이내 부딪히기도 하며 잠시 앞에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다시금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따뜻한 날씨에 거추장스러운 옷들은 옷장에 가둬 놓고 매끈한 속살들을 뽐내면서 다니는 사람들은 총총걸음으로 내 시야에 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초록색으로 색칠된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 서울대입구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내리면서 혹시나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재철이에게 연락했다.

“어이! 친구.”

“어디야?”

“거의 도착했어. 넌?”

“난 지금 막. 그러면 3번 출구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이따 봐!”

다행히도 먼저 도착해서 한가진 역 내부를 걸어서 3번 출구 위로 올라왔다. 분명 좀전까지도 따가운 햇살이 내 눈을 부시게 했는데 구름이 애써 햇빛을 막고 있는 듯이 약간은 우중충한 날씨가 느껴졌다. 근처의 휴대폰 판매점에서 귀를 따갑게 하는 요즘 유행하는 그룹가수들의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노래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만큼 기괴하면서도 어눌한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즘 노래에 적응을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시끄러운 노래를 피해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다. 5분 정도가 지나니 회색 배낭을 메고 편한 옷차림을 하고 온 재철이가 지하에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야!”

내가 말했다. 재철이가 골목 입구로 달려왔다.

“용하게도 일찍 일어났어.” 재철이가 씩씩하게 말했다.

“잘 했어. 앞에 보이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자.”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버스 정거장으로 걸어갔는데 관악산으로 가는 등산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었다. 그 줄 뒤에 섰는데 우리가 가장 젊어 보였다. 잠시 뒤에 도착한 5513번 버스에 우리는 오를 수 있었다. 만원버스엔 일부 등산객들의 대화소리와 그리고 버스에서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우우우웅!’ 소리를 유난히 크게 내며 거칠게 운전하는 버스의 흔들리는 리듬에 맞춰 선채로 몸을 흔들면서 바깥 경치에 시선을 두었다.

“오늘 뭐 챙겨 왔어?” 내가 물었다. 재철이가 굳이 안 꺼내도 되는데 흔들리는 버스에서 힘겹게 한 손으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한 손으로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맨 뒤, 가방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이 세 개랑 초코바 두 개……. 그리고 물병 한 개, 그리고 바나나 두 개.”

“오! 엄청나게 싸왔구나. 다 먹으면 배부르겠는데?”

“그런데 아침을 안 먹었어. 배고파서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아.”

“나도 배고파. 우리 등산로 입구 앞에 식당이 있으면 거기서 간단하게 먹고 올라가자!”

“그럼 혹시 배불러서 움직이기 힘들지 않을까? 돼지가 된 것처럼 말야.”

“어차피 우린 돼지 같은 놈들이잖아. 쉬엄쉬엄 올라가면 될 거야.” 재철이가 미소 지으며 맞아, 맞아 중얼거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한참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샌가 버스가 한 차례 덜컹거리고 ‘퓨웅-’ 하는 소리를 내더니 문이 열렸다. 버스에서 내려서고는 비명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켰다.

 

 

주변을 바라보니 속이 뻥 뚫릴 만큼의 트인 공간에 감동하여 숨을 크게 쉬어 보였다. 그러고는 공터 앞에 큼지막하게 솟아 있는 기와형태의 지붕 아래에 ‘관악산 회관’이라는 팻말이 쓰인 건물 1층의 편의점에 들어가서 꽁꽁 얼어붙은 얼음물 한 통을 구입했다. 재철이가 잠시 기다려보라면서 긴장이 되었는지 생전 처음보는 스트레칭을 하였는데 마치 원숭이가 재주를 부르는 것처럼 기괴한 모습이었다. 나도 좋다고 그 것들을 따라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회색모자의 이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멍하니 서서 미어캣처럼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스트레칭을 하는 우리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멀뚱히 쳐다보았다.

 

 

몸을 다 푼 뒤 좌측에 관악산 공원이라는 멋진 궁서체의 글씨가 적힌 관문을 뚫고 입장했다. 지루한 아스팔트 길이 두껍게 이어져 있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아줌마 세 명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각각 빨강, 노랑, 파랑색의 신호등 색깔의 등산복을 뽐내면서 가방에 스틱을 꽂은 채 엄청난 모험을 했던 것처럼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땀을 흘리며 입구 쪽으로 나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등산복이 아닌 평범한 차림의 옷은 우리뿐인 것 같았다. 잠시 길을 걸어가니 둘레길 코스를 설명하고 있는 지도판이 보였지만 우리는 산 정상을 목표로 길을 나선 것이기에 깔끔하게 무시하고 다시금 길을 걸었다. “아, 참! 입구에서 사진을 안 찍었네.”

재철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이따가 돌아올 때 찍자.” 내가 안심시켰다.

 

 

특이하게도 등산로에는 젊은 모녀로 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어릴 때 왔었던 기억에는 부자지간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었던 것 같았는데 여하튼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괜히 내가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을 걸어서 입구에서부터 꽤 많이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아스팔트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른쪽은 가파른 산기슭에 뿌리내린 나무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는데 왼편은 영락없이 건물뿐인 도시의 각박한 모습이 펼쳐져서 등산로를 기준으로 동과 서가 지극히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미 등산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절반은 얼굴이 술에 취한 듯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높은 곳까지 올랐던 흔적으로 보였다. 반대로, 평화롭고 깨끗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아마도 앞에 있는 공원이나 둘레길을 다녀온 모양으로 추측됐다.

 

 

우리는 직진하는 코스로 가지 않고 우회하여 나들이 숲과 호수공원을 들렀다 가기로 했다. 재철이가 빨리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공원을 들르는 게 낫지 않겠냐고 내게 물었지만, 분명히 다녀오고 나서는 맥이 빠져서 구경조차 할 기운이 없을 것이 분명했기에 구경만 잠깐 하고 다시 오르자고 설득했다. 공원으로 향하는 좌측 길로 빠져서 걸어가다 보니 길의 왼쪽 난간 아래로는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속이 다 보이는 맑은 물을 쳐다보기만 했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차오르는 숨을 잔잔하게 가라앉히고 있음을 느꼈다. 계곡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과 그 아래에는 계곡을 따라서 이어진 산책로가 있어서 그 쪽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가만히 계곡을 쳐다보며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 물에 손을 담그며 시원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노부부는 계곡 바위 위에서 신선처럼 때 아닌 막걸리판을 벌여 놓았다.

 

 

녹색 옷을 입은 나무들이 만연했다. 호수공원에 다다를 때엔 산의 정기가 뿜어져 나와서 내 콧바람을 더욱 세차게 만들었다. 호수공원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것 같은 섬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니 잔잔하게 호수에 물결이 일었다. 녹색 물속에는 잉어 두 마리가 젊고 유유히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어여쁜 연인들이 지나가는 새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사랑의 말들을 중얼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어리다는 건 좋아.” 재철이가 중얼거렸다.

 

 

모래알이 깔린 길을 지나고 계속 직진하다 보니 우리가 가는 길이 왠지 관악산 계곡의 나들길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서 재빨리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잠시 조용한 발자국 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사람이 없는 구간에서의 잠깐의 침묵이 나뭇잎이 펄럭거리며,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면서, 새들이 지저귀면서 만들어 내는 자연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계단을 오르고 다시금 넓은 아스팔트 길에 합류했다. 잠시 후, 소나무들이 멋지게 우거진 숲길을 지날 땐 이제부터는 각오하라는 듯이 바람이 한껏 세차게 불어왔다. 그 바람의 경건함에 온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갈래길에서는 어떤 나이 많은 여인이 다른 여인에게 길을 물어봤다. 아마도 관악사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인 삼막사를 가려는 듯했다. 때때로 크게 노래를 틀어 놓고 등산을 하는 노인들도 보였다. “도대체 왜 저렇게 노래를 켜 놓고 다니는 걸까?” 내가 궁금해서 중얼거렸는데 친구 녀석이 유쾌하게 답을 외쳤다. “나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산이 주는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면서 운동을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음악의 흥겨운 리듬을 따라서 한발한발 내딛으려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내가 덧붙였다. “아니면 그저 노래가 듣고 싶어서 일 수도 있겠어.”

 

 

갈래길에서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정상인 연주대로 가려면 좌측으로 향하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표지판의 옆에는 ‘바르게 살자’라는 글귀가 적힌 커다랗고 타원형의 돌덩이가 우뚝 서있었다. 우리는 그 돌덩이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꼬맹이 둘이 지나가면서 글귀를 보고는 서로에게 “바르게 살아라.” 말하면서 지나치기에 우리는 간만에 크게 웃었다.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흙길이 시작되었고 낮은 경사에 돌맹이가 드문드문 땅에 박혀 있어 걸음걸이를 방해했다. 길은 두 세 갈래로 갈리다가 다시 합쳐짐을 반복했다. 인적이 드문 길로 갈 때면 우리가 위험하거나 통행이 금지되어 있는 외길로 빠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하다가도 다시금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합쳐지면 안도하곤 했다. 바람소리가 점점 거세지면서 이내 나뭇잎들이 내 머리를 때리려는 위협을 가하듯이 나에게 무섭게 다가왔다가 스쳐서 지나갔다. 점점 대지의 여신과 산의 신령들의 성스러운 울림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재철이를 보았는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며 말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다행이었다. 숨을 헐떡이다가 힘이 들 땐 바람이 내 등을 떠밀어주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지쳐서 되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정말이다. 가끔씩 떨어진 솔방울을 잡고 길 옆으로 던지면서 길을 나아갔다. 이윽고 재미없는 나무계단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다시 돌길이 시작되었다. 쉬엄쉬엄 가는 이들은 웃음을 띄고 있었고 잽싸게 오르는 이들은 투지가 가득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후아, 후아.” 가슴의 소리를 내며 사뿐사뿐 징검다리를 건너 듯 튀어나온 돌맹이 부분만 밞아 가기도 하며 평범한 걸음에 재미를 붙여보려 애썼다. 저기 멀리 보이는 우리와는 다른 길을 택한 낯선 자들이 나무들 사이로 가끔은 왼쪽에도 보이고 가끔은 오른쪽에서도 반갑게 지나다녔다. 나무계단과 돌길이 반복되었고 무모하거나 모험심이 강한 사람들이 청설모처럼 없는 길이나 험한 길을 찾아 갈까봐 우려하여 ‘출입 금지, 샛길 폐쇄 안내’ 라고 적힌 팻말을 보았다.

 

 

속옷이 땀에 젖어버렸지만 아직 물을 마시지는 않았다. 꽁꽁 얼어 있는 물은 쉽사리 녹지 않았다. 20분 정도를 더 올라가서야 우리는 잠시 앉아서 가져온 오이 한 개와 재철이가 가져온 초코바 두 개를 나눠 먹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얼어붙어 있는 내 것은 마시지도 못하고 대신 재철이의 물을 조금 마셨다. 바람은 대지의 숨소리처럼 거칠게 불어오다가 이내 침묵을 반복했다. 바람이 불 때면 재철이가 외쳤다. “좋다! 너무 좋다!” 그리고 가끔 나뭇가지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서 ‘어!’라는 감탄사와 함께 이내 놀라곤 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 3명이 용케도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녀들은 모여서 쪼그려 앉아 도마뱀이라도 본 듯이 꺄르르 웃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메아리로 퍼져왔다.

 

 

우리의 현재 위치와 함께 봉우리들의 위치와 거리가 나와 있는 지도판이 다시금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지도를 자세히 쳐다보고는 한탄의 한숨을 쉬었다. 좀 더 좌측의 길로 빠졌어야 연주대로 바로 가는 길 위에 설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재철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는 멍청하게도 삼막사 방향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던 것이었다. 젠장! 왼쪽, 왼쪽으로 가야만 한다. 한차례 좌절을 느끼니 숨소리가 더 가빠졌다. 그때 젊어 보이는 남자 녀석이 노인들처럼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은 채 우리 앞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짜증이 나니 그 녀석이 꼴 보기 싫었다. 그래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우리는 꾸역꾸역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좁아지고 좁아진 만큼 험난해지고 있었다. 자연의 거대함에 비해 내가 이 산에서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은 세발의 피였다. 인간의 한계가 느껴졌다. 동시에 자연의 태연하면서도 강인함을 자랑하는 거만함도 느껴졌다. 정상도, 산밑 도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중간지점을 오를 때가 가장 암울했다. 그저 올라가라는 무언의 신호에 따라 무겁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큰 굉음을 내며 비행기가 낮게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 나뭇가지, 낙엽과 돌계단만이 보였다. 점점 시야는 좁아져서 내가 다음으로 내딛을 곳만 볼 수 있었다. 우리를 먼저 앞질러 가던 그 재잘대던 세 명의 꼬마 아가씨들은 바위에 앉아서 물을 마시면서 입을 쉬지 않고 놀리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역에 정차하고 있는 기차를 잽싸게 지나는 급행열차처럼 냉정하게 그녀들을 지나쳐 올랐다.

 

 

숨이 더 가빠지고 발걸음이 느려졌다. 올라가면서 목을 축이다 보니 더욱 숨이 차올랐다. 입술이 마르고 심각한 경사가 나타났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말이 없어졌다. 길이 애매하게 갈라져 있었는데 오른쪽에 비해서 왼쪽 방향은 경사가 훨씬 높아 보였다. 아까 봤던 지도를 상기시키면서 우리는 어떻게든 왼쪽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한 번 지독해 보이는 길로 도전을 시작했다. 가파른 경사지대에서는 나무들이 깊게 박아 놓은 뿌리가 점차 드러났다. 특히 삶의 의지가 강한 녀석들은 안간힘을 다해 뿌리내리고 있었다. 대충 보아도 60도 이상의 절벽을 땀을 쏟아가면서 올랐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내가 가려는 정상으로 향하는 길인지 이젠 확실치도 않았다. 불안함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경사에 못 이겨 추락하는 건 아닌지 하는 염려가 나를 조여왔다.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커다랗고 날카로운 바위가 우리의 앞을 막았다. 그 바위에 올라야 했다. 이젠 두 발로 걷는 게 아니라 산양 마냥 두 손으로 지탱해가며 걸어가다가 도마뱀처럼 몸을 낮게 숙이고 기어가기도 했다. 잠시 내가 오르는 폼을 떠올려 보았는데 영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시금 생존을 위해 집중해야 했다. 생존을 맞닥뜨리니 숨소리마저 들려오지 않았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디딜 곳을 생각하고 움직였다. 대략 3초 간격으로 살아있음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절정의 단계에서의 남녀들처럼 온 몸이 떨리면 잠시 크게 숨을 쉬었다. 재철이가 뒤에서 “악!”, “오우!”, “이런 씨!” 라는 소리들을 내면서 아직 무사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발을 헛디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절박함에 앞으로 열심히 살아가겠노라는 다짐의 눈빛을 보여서 신을 거센 분노를 풀어줘야 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 말고는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향하고 있는 저 위가 내가 생각한 목적지인지, 다른 봉우리인지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힘든 걸음 끝에 고비를 넘겼다. 거대한 바위를 밟고 올라섰는데 젠장! 한차례 바위가 위로 더 솟아 있었다.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바위다. 다시 한 번 숨을 가다듬고 좀 더 오르다가 우측편에 구름 아래로 완만한 능선이 태양빛을 내리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잽싸게 오른쪽편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경사진 길을 올랐다. 기어오르다가 마침내 능선에 도착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나마 사람들이 다닐 것 같은 길이 펼쳐져 있었다. 만세! 우린 작은 승리를 이룬 기쁨에 하이 파이브를 했다.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좀 전과는 다르게 정상에서의 바람 소리는 좀 더 사납고 날카로웠다. “춥다! 겨울이다.” 재철이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그에게서 쉰 목소리가 났다. 다시 크게 솟아 있는 바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좀 전의 고비보다는 덜 했지만 이도 만만치 않았다. 나무 뿌리와 몸통, 움푹 패인 바위틈에 의지하며 올라야 했다. 어릴 때 바위에 오르는 나를 위해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는 없었다. 혼자 올라야 한다. 험난하고 고된 등반이 계속되니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문득 어릴 때 버스기사와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내게 그렇게 펄쩍 뛰며 반대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때 당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저 앞의 뾰족한 선인장과도 같은 바위 위로 태극기가 빼꼼이 펄럭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름 모를 정상이었다.

 

 

우측길로 선회하여 그나마 경사가 완만한 쪽으로 바위를 기어오르다 보니 등산객들을 위해 잡고 오를 수 있는 길게 연결된 밧줄이 보였다. 일단 밧줄을 탯줄처럼 꽉 잡고 올랐다. 밧줄을 잡고 두세걸음 오르는 순간 까마귀가 ‘깍깍!’ 울고는 지나갔다. 순간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안 죽어! 나 안 죽는다고 이 자식아!”

 

 

거의 다 왔다. 마지막 자그마한 칼바위를 오르려 하는 순간 저 우측에 무언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내 머리위로 보이는 저 태극기가 꽂혀 있는 바위보다 더 높아 보이는 정상이 있었다. 이 봉우리는 무엇이지? 울고 싶었다. 그저 허무함에 순간 힘이 빠졌다. “젠장!” 내가 소리를 지르니 재철이가 영문도 모른 채 내 뒤에서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옆 봉우리를 보았는지 아! 하는 한탄의 외침을 쏟아냈다.

“어쩔래?” 불안하다는 듯 내가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재철이가 지혜롭게 말한다.

“어차피 저기가 우리가 찾던 정상이라고 한다면 저 태극기가 꽂혀 있는 곳에 괜히 올라서 힘을 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우리 여긴 접고 저쪽으로 가보자!”

 

 

역시 합리적인 녀석이다. 우리는 다시금 미끄러운, 우리가 올라온 역사를 다시 역행했다. 내려오는 바위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힘이 빠져서 이번 생을 아쉽게 마감할 뻔한 순간이 두 번, 바람이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몸이 흔들려서 균형을 잃고 생을 마감할 뻔한 순간이 한 번 있었다. 결국 정신줄을 잡아서 그 크나큰 바위를 내려왔다. 다시금 저 옆의 봉우리로 오르기 위해서는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되어야 했다. 조금은 평탄한 길이 시작되었다. 긴장과 떨림의 연속된 순간이 지나가니 니코틴의 향수가 그리워지며 침이 말랐다. 내 물병 안의 얼음이 고작 오 분의 일 정도 녹아 있었다. 얼음에서 미끄러져 나온 생명수를 들이켠 다음 다시 걸었다.

 

 

이번엔 작전을 바꿨다. 어떠한 샛길의 유혹이 온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다닐 만한 큰 길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걷다가 가장 먼저 보인 길 표지판엔 우리가 방금 전에 오르다가 내려왔던 태극기가 꽂인 곳을 나타내는 ‘국기봉 0.3km (5분)’ 글자가 쓰여 있었다.

 

 

우리가 보았던 ‘더 높은 봉우리’가 아마도 ‘삼막사’인 것 같았다. 어쨌든 그 길 외에는 오직 내려가는 길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어디로 갈 지 모르는 채로 결국 이곳으로 왔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연주대를 갈수 있을 것인가? 삼막사를 지나야 연주대를 갈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일까? 삼막사는 분명 지도에서 봤을 때 오른편에 있어서 연주대와는 정 반대의 방향처럼 보였는데……. 궁금증과 불확실성이 더 커져만 갔다. 길 앞편에서 들려오는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이제는 여러 곳에서 들려왔다. “멍청한 놈들!” 우리를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미친듯이 울어 댔다. 한차례 고비를 밟고 보니 왠만한 길은 완만하고 편해 보였다. 어릴 때 산을 타면 항상 아버지가 타이르던 말이 생각났다. “편하고 쉬워 보이는 길이 가장 위험해. 사고가 나기 십상이지.”

우리를 지나쳐 가는 안경을 낀 노인은 휴대폰에 집중하며 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등산의 고수가 틀림없어 보일 정도로 움직임에 여유가 있었다. 이젠 이름모를 소름 끼치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햇빛이 점점 약해지면서 약간의 두려움이 생기고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다시 우리 앞에 표지판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우리는 좌측으로 가야 할 텐데 좌측 방향은 ‘무너미고개’ 방향이며 1.4km가 남았다고 적혀 있었다. 우측은 삼막사였다. 무조건 좌회전으로 가야했다. 어딘지 모를 무너미고개로 향했다. 그곳을 지나면 연주대로 가는 길이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희망을 가졌다. 우리는 신이 났다. 잠시 몸을 흔들었다. 기쁨의 의식과도 같았다. 그래! 결코 틀린 길이 아니야!

 

 

빠른 걸음으로 보다 즐겁게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삶은 걸음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갑작스레 정상부에서 때 아니게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꼬불꼬불 이어져 있었다. “하! 후!” 호흡을 반복하며 걸어갔다. 갑자기 빨갛고 투명한 고글을 쓴 사람이 산악 자전거로 포장도로를 달리며 지나갔다. 어떻게 이 높은 곳에 자전거를 타고 올라왔는지 놀랍기만 했다. 세상엔 이해못할 일들이 많았다. 길 양쪽엔 잣나무와 소나무가 가지런히 정렬한 것처럼 일렬로 솟아 있었다.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을 끄적거린 장소도 이런 곳이 아닐까 싶었다.

 

 

계속 오르다 보니 어느 순간 저 앞에는 웬 철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자전거를 눕혀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떤 남자가 보였다.

“혹시 여기 막다른 길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 남자가 앞쪽에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숨겨져 있는 좁은 철 계단 길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딱 보아도 대중적인 길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한번 잘못 들어온 길일지라도 끝까지 가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 돌아가는 허무함을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철 계단을 올랐고 그 위에는 송전탑이 서 있었으며 주변에는 기상을 관측하는 건지 목적을 모를 자그마한 건축물이 보였다. 관계자 외엔 출입금지라고 써 있었기에 샛길로 돌아서 울타리를 따라 이어진 흙 길을 걸어갔다. 오르락, 내리락 반복하다 보니 다시금 아까 다녀왔던 시멘트 길로 보이는 중간에 착지했다. 우리는 그저 고개를 넘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애초에 연주대로 가는 길은 이 곳엔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길이 있었다면, 정보력이 좋은 놈이라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리에 남아 있던 힘이 빠져나가고 땀은 바람에 증발하여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다시금 어느 봉우리에도 오를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아까 지나온 국기봉의 꼭대기도 밟지 못했다. 어물어물 대다가 이 꼴이 났다. 좌절감에 재철이도 말을 잃었다. 우리는 아까 마지막으로 보았던 표지판 앞의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항상 이랬다. 어설픈 객기로 달려왔지만 제대로 이뤘던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휴대폰의 시계가 16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입고 왔던 검정색과 흰색 조합의 런닝화와 검은색 카고 바지는 올라오는 동안 황토색의 흙이 수없이 어루만져서 남자의 얼룩을 만들었다. 우리의 모습은 패잔병과 다를 바 없었다. 바위처럼 한동안 가만히 앉아서 불어오는 바람만을 느꼈다. 바람, 결국 바람이다. 나를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힘을 준 것도 바람이고 나를 지금 위로해 주는 것도 바람이며 나에게 위기를 주었던 것도 바람일 뿐이다. 결국엔 어딜 가든지 태초의 품 안에 있었을 뿐이다. 애초부터 등산객들이 많이 가는 길만 따라갔어야 했을까? 젠장, 젠장, 젠장! 짙은 풀색의 야상 점퍼엔 솔향기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물병을 바위에 내리쳐서 남은 얼음을 마저 부쉈다. “아마 연주대는 여기서 엄청나게 먼 곳에 있을 수 있어. 다음에 마음먹고 다시 도전해 보자.” 재철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은 녀석이다. 나뭇잎을 말아서 담배를 피는 시늉을 해 보이면서 낄낄거리길래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에게 정상의 길은 미지의, 그리고 보지도 못한 연주대가 아니었다.

“그저 내가 가는 길이 나만의 길인 것이지. 거대한 산을 이 정도 어루만져 봤으면 된 거야. 길은 어디든지 길이니 말야. 우리에게 가장 높은 곳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야.”

 

 

장엄한 산은 누가 뛰어나며 누가 못났는지에 대해 그토록 따져왔던 내게 허무함을 주었다. 산아래서 시기심과 질투, 그리고 욕심과 후회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정상만을 생각하다가 놓쳐온 장면들이 그리워졌다. 따뜻한 코코아가 생각났다. 그리고 시원한 소주에 두부김치.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참회와 후회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건 알 수 없는 나만의 노래가 흘러내린 것이었다.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산과 산을 넘는 집시가 되고 싶다. 역마살은 유혹을 넘어서 내게 의무로 다가왔다.

모자를 쓴 젊은이가 우리 앞을 지나가더니 잠시 우리를 쳐다보고는 제 갈 길을 떠났다. 앞을 바라보니 멀리 산 밑의 넓은 대지가 보였다. 안개와 구름에 가려 지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성냥개비 같은 건물들이 얼른 내려오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바위와 산, 바람과 소리치는 새들이 이제 그만 내려가보라고 하며 싸늘한 추위를 선사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만물박사가 떠나기 전에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점에서 항상 미래를 꿈꾸며 살게 되지. 하지만 그 순간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아. 결국 사람들이 삶에 대해서 후회하는 이유는 딱 그거일 뿐이지. 소중하다는 생각을 잊고 미래만을 바라보다가 잊어버린 그 시간들 말야. 그러고는 가족에 대한 부양을 핑계대기도 하고 하염없이 다른 하찮은 것들을 통해서 작아지는 나 자신을 잊으려 하기도 하지. 하지만 후회하고 있는 그 시간 마저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걸까? 감성이 죽어가는 세상이야! 돈으로 생각한다는 건 죽은 일이지."

 

 

내가 서 있는 능선에 오늘의 마지막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백야처럼 눈부시게 밝지만 괴로웠다. 삶이 백야였다.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을 우리만의 정상이라고 정의해 두었다. 재철이는 컵라면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를 세게 껴안아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저 동물이 아니었음을. 숨을 쉴 수 있었다. 크게, 생명의 숨을, 그리고 사랑의 웃음을.

 

 

시끄러웠던 어린 세 명의 그녀들이 다른 방향의 그녀들만의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반가움의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의 내 양팔은 제멋대로 움직이면서도 지탱하고 있는 두 발은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려가는 길 마저도 하나의 나일 뿐. 정상의 능선위에만 내리쬐던 햇빛이 어느 정도 내려오고 있던 우리에게도 계곡의 틈 사이로 밝게 비추었다. 똑같은 코스로 내려오기에 지루함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마냥 좀 전에 보았던 것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몇 시간 전에 지나친 반대쪽 면을 보았다. 내리막길의 모습과 올라오며 보았던 나무들의 뒷모습, 바위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는 세 번, 제철이는 두 번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리고 두 번, 재철이의 흰색 모자가 날아갈 뻔했다. 아래로 물이 흐르는 계곡의 최상단에는 티 없이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생명의 시작점, 대지의 눈물은 소중하면서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발가락이 신발에 강하게 부딪혀서 그 충격에 발가락에 통증이 점점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비가 될 정도로 아파올 때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가 보였고 이제부터는 거의 경사가 완만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누가 내려오고 있는지, 재철이가 제대로 내려오고 있는지 뒤를 돌아보면서 확인을 했다. 만약 인간에게 눈이 뒤에도 달려 있었다면 욕심은 줄어들고 배려는 늘었을 것이었다.

 

 

물병의 마지막 남아 있는 얼음을 잘게 깨부쉈다. 이대로 관악산과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 잠시 자리에 앉았다가 땀을 닦고 다시 일어났다. 다리가 떨려왔다. 한번은 침략자, 그러나 개척자로 불리우는 콜럼버스처럼 대지에 키스를 하는 시늉을 냈다. 내려오는 길에 물을 담는 약수터도 보였다. 관악산의 성수를 물병에 가득 담았다. 재철이가 물을 담고 마시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그의 옆에서 무의식의 댄스를 선보였다.

 

 

“잠시 길을 잘못 들었던 것에 대해서 떠올려 봤는데 그저 아무 후회도 없는 거야. 맑은 땀이 흐르는 걸 느꼈거든. 그것 만으로 만족한데 말야. 왜 우리의 지나온 삶에 대해서는 항상 후회하는지, 그 후회의 정도가 왜 그렇게 큰지 모르겠어.”

재철이가 말했다. 

“그건 아마도 물욕과 온갖 욕심들 때문이지.” 내가 대답했다.

“공(空)에 대해서 깨달은 것 같군. 불쌍한 승려여!”

“나는 불자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현자도 아니야. 그저 그렇게 생각할 뿐이야.”

거의 막바지에 내려왔을 때 방심하여 바위를 발로 차고야 말았다. 발톱이 깨질 듯이 아파왔고 양말 속에선 피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젠장, 등산화라도 신고 왔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아 있는 물을 입에 부어 넣으며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물을 내 눈에 쏟아 부었다. 옆에서 재철이가 힘들게 웃었다.

 

 

오는 길에 연주대는 좌측으로 가야 한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이 표지판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틀린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떠났다가 다시 왔다. 지나왔던 계곡에는 흰색, 검정색, 갈색과 청록색의 다채로운 빛을 띈 날개를 가진 새가 물 위에 서서 입을 다시고 있었다. 먹을 것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넓은 길에 오랜만에 발을 디뎠을 땐 온 몸에 긴장이 풀려 마치 힙합을 하는 90년대 흑인들의 걸음걸이를 하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서 하산을 하는 등산객들이 꽤 많았는데 일렬로 오는 모습은 나를 흡사 피리부는 사나이로 만들어 주었다.

 

 

드디어 입구를 벗어났다. 재철이와는 다음 도전을 위한 짙은 악수를 하였다. 전철에서 정신없이 졸다가 동네에 도착했다. 땀냄새가 내 몸을 감쌌다. 벌써 붉은 그라데이션의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시금 내 거리에 섰다. 거리 위에는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르고 최고가 되려 했던 나만이 남아 있었다. 마치 바에서 끝없이 양주를 구걸하는 여인네들처럼 나 자신이 큰 인물이라는 겉포장을 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 모습은 여느 비참하고 안쓰러운 구걸에 다를 바 없었다. 거짓의 노력만이 낭자했다. 그에 따라서 결말만을 원하는 무위도식의 패러독스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돈과 명예, 그리고 모두가 추구하는 것을 쫓다 보니 결국 내 곁에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좋아하는 것이 좋아했던 것이 되어 버리고 그것이 결국엔 발목을 잡게 되었다. 일이라는 것이 그러했다. 나라는 사람은 어디서 필요한 것인가? 내가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도 불필요했고 중요하지 않았다. 어설픈 위버맨쉬! 삶에 의문을 던지다 삶의 의지를 잊어갔다. 풍족하게 먹고, 자고, 입어야 한다는 의식주의 욕망과 더불어 불완전한 성욕이 진정한 나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마다 그 그릇의 크기가 있다면 내 그릇은 뾰족하고 무언가를 담기 힘들만큼, 기껏 담아봐야 공기와 물과 모래밖에 담을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하마르티아, 빗나간 인생은 소중한 C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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